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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건설사 재조명②

국내 건설역사의 ‘비극’ 삼풍건설 붕괴

김길태 기자   |   등록일 : 2018-05-11 13:40:16    최종수정 : 2018-05-21 00:5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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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자료=나무위키]

성수대교 붕괴 충격 가시기도 전에 대형 참사 반복
문민정부 집권기 사고 중 가장 피해 큰 사고로 기록

삼풍건설그룹의 모태는 삼풍건설산업이다. 지난 1967년 설립된 삼풍건설은 자본금 30억 원에 종업원은 기술자 34명을 포함, 733명이며 도급한도액은 96억 원이었다. 초기 설립 당시 명칭을 ‘동경산업’이라고 하였으나 1967년 삼풍건설로 명칭을 변경했다.

설립 첫해인 1967년 토건공사면허를 취득했으며 1970년에 전기공사면허를, 1974년에는 군납.수출입업 면허, 1975년에 해외건설면허를 각각 취득했다. 

삼풍건설산업은 1970년대 중동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1977년 요르단에 진출하여 건설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사업은 원활하지 못했고 창업주 이준 회장의 장남 이한웅이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결국 1979년 무렵 요르단에서 철수했다. 1983년에는 해외 건설 면허도 반납했다.

이후 국내에서 주택사업을 주로 벌이다 1988년 유통업진출을 위해 도소매업 면허를 취득, 1989년 삼풍백화점을 완공, 본격적으로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삼풍건설은 주로 삼풍아파트 건설 등 아파트 건설업에 치중했었다. 그러나 1987년 무렵부터 서울 서초구 대단지아파트를 건설하면서 삼풍백화점 공사를 동시에 추진하게 됐다.

4666평의 대지에 연면적 2만2387평, 지하4층, 지상5층 크기로 세워졌으며 매장면적 8805평에 점포수도 556개에 달하는 매머드급 점포였다. 608대의 승용차를 동시에 주차시킬 수 있는 공간과 백화점과 레포츠 등 2개동이 철근콘크리트건물로 대칭형으로 세워졌다. 지하4층에는 기계실 및 전기실이 들어섰고, 지하 2-3층 주차장, 지하1층 판매시설 및 주차장, 1-5층까지가 판매시설, 운동시설, 위락시설 및 식당가 등으로 사용돼 왔다.

1988년 삼풍아파트 완공 및 입주에 이어 1989년 11월30일 삼풍백화점이 개관되었으며, 이 때부터 삼풍건설은 건설업 분야의 건설 부문과 삼풍백화점 경영의 백화점 사업 분야로 나뉘어서 운영하게 되었다. 1991년 이준의 차남이었던 이한상씨가 삼풍건설 및 삼풍백화점 사장으로 취임했다.

유통업에 치중하면서 주택건설업은 점차 축소, 도급순위는 800위 대로 떨어졌지만 유통업은 승승장구했다.

삼풍백화점은 1989년 설립 이후 국내 주요 백화점들을 제치고 대표적인 명품백화점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는데,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삼풍백화점은 1994년 당시 규모가 서울시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다음가는 전국 2위의 매장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지금 대표적인 강남의 명품 백화점으로 불리는 현대백화점 본점과 갤러리아백화점도 당시에는 삼풍백화점보다 작았다.

삼풍백화점은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 본점과 함께 서울의 중산층고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백화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개점 당시부터 고성장이 기대돼 왔으나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데다 지나친 고가상품 중심의 판매전략에 매달려 백화점영업은 신통치 않았다는 게 당시 관련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특히 강남 중산층 고객들을 겨냥한 마케팅전략으로 유명수입 브랜드 등 고가소비재를 집중적으로 취급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몰락

지난 1995년 6월 붕괴사고로 1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무엇보다 삼풍건설은 건설업보다 삼풍백화점 영업 등 유통업을 더 사업의 중점으로 여겼다는 게 당시 건설업계의 설명이다. 삼풍건설은 건설 사업에 대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로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1995년 6월29일, 북관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으면서 1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예고 없는 사고가 아니었다. 사고 당일만 해도 심각한 균열현상이 경영진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수사 결과 균열현상은 5년 전부터 진행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삼풍백화점 건축 당시부터 수차례의 용도변경 및 부실공사, 부실 관리 등으로 인해 1995년 초반부터 건물에 이상이 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당시 경영진은 땜질식 보수공사로 유지해왔다. 특히 점차 건물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매장 영업중단은 커녕 명품 상품만을 밖으로 빼내고 운영을 강행했다.

삼풍백화점은 첫 삽을 뜨기 이전부터 각종 의혹이 무성했다. 당시 사고수습을 맡은 지자체와 경찰 등에 따르면 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원래 아파트지구로서 대형 판매시설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상업용지로 지구지정 변경과 건축승인이 이루어지고, 백화점도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건설업계, 경찰 등에 따르면 당시 지상 4층 일반상가로 허가받은 건물을 건축주인 이준 회장이 5층 백화점으로 바꾸려 할 때, 서초구청과 서울시청 담당 공무원들에게 뇌물이 건네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 삼풍백화점은 공사 때 쓰인 설계도면이 관계기관에 제출한 허가도면과 달랐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5층으로 증개축을 할 때 우성건설이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자, 이준 회장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삼풍건설로 시공사를 변경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로 인해 이준 회장과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삼풍건설그룹 운영진들은 모두 구속되어 결국 삼풍건설그룹은 전체가 해체되고 말았다.

이준 전 회장은 70-80년대 건설붐과 부동산 투기바람을 타고 부를 축적, 건설·유통업을 기반으로 한 중견기업을 일궈냈으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함께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초래한 책임으로 7년6개월 간 복역한 뒤 출소했고 출소한지 6개월여 만에 지병이 악화되면서 극적인 팔십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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