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은 강자고 을은 약자다. 갑은 자신이 스스로가 힘이 있는 편에 서 있다는 생각의 산물이고, 을은 언제나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의 산물이다. 차를 몰고 가는 운전자는 갑이고, 차를 겁내면서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은 을이다. 을은 무거운 쇳덩이로 만들어진 차의 질주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다. 그래서 설사 녹색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넌다 하더라도 신호위반을 하고 달려올지도 모르는 운전자의 갑질을 항상 무서워 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을인 보행자가 무단횡단을 하는 상황에서는 간덩이가 떨어질 만큼 무시무시한 차량의 경적 소리에 얼어붙은 채 갑의 관대한 처분을 바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육중한 15톤 덤프트럭을 운전하며 도로에서 갑질을 일삼던 운전자도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순간 그 자신도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평균적인 가치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크고 좋은 차를 운전하는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녹색신호의 횡단보도는 물론, 무단횡단하는 보행자까지 너그럽게 보호해주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줄 안다. 이런 관계는 가역적인 갑을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튼튼한 차의 운전석이나 편안한 뒷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도어 투 도어 서비스에 익숙한 재벌2세쯤 되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넓은 도로 위의 횡단보도를 건널 일도 없고, 항상 건물 현관 앞에서 내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되니 주차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만원 지하철 속에서 성추행을 당할 염려도 없고, 늦은 밤중에 택시를 기다리며 몇 시간 도로 위에 서서 손을 흔들 필요도 없다. 자신의 수고를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을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설령 그가 매우 선한 심성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가 을의 입장에 서보지 않았거나, 을의 입장이 되지 않도록 미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역적인 갑을관계가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계약관계에서 보통 돈을 주는 위치는 갑이고, 돈을 받고 일을 해주거나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은 을이다. 갑은 정해진 기간, 정해진 공정에 따라 돈을 지불할 의무가 있고, 을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갑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관계에서 여러 가지의 갑질이 발생한다. 통상적으로 시장에서 형성된 표준단가보다 훨씬 싼값으로 일을 해주거나 물건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갑질에서부터, 응당 치러야 할 대금을 늦게 준다거나, 돈을 제 시간에 주는 댓가로 일부를 떼고 준다거나, 터무니없는 사안을 트집 잡아 돈의 지급을 미루고 원래 계약조건에 없었던 일까지 덤으로 시키면서 추가비용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는 것들, 그 모두가 부당한 갑질이다. 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이뤄지는 불공정거래의 단면들이다. 그런 부당한 갑질을 바로잡기 위해서 공정거래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땅에서 가장 위세가 등등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국가기관이나 지자체와 같은 공공기관이다. 민간기업이나 개인이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을 상대한다는 것은 곧 그 기관의 공무원과 거래를 하는 것인데, 공무원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기관의 이익, 즉 공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공익을 위해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품질의 용역이나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야만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짜여진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을 절감하고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을 절감하고 좀더 빠른 시간에 정책의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우수한 공무원으로 평가받아 승진이나 승급에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공무원의 부당한 갑질은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민간인에게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공무원이 작성한 과업지시서는 언제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라, 소위 에프엠대로 하자면 책정된 예산의 몇배를 들이더라도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도 나중에 책임문제가 있기 때문에 과업지시서에 이것저것 다 집어넣은 것일 뿐 실제로는 그 반의 반만 하면 된다는 공무원의 말만 믿고 입찰에 참가하는 것이 오래전부터의 관행이다. 또 당초의 정책이 바뀌어 과업의 방향이 뒤틀어져서 정해진 시간내에 과업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해진 경우에는 공식적으로는 과업중단을 시켜서 시간을 벌고 실제로는 과업중단기간 동안 처음부터 과업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지만 인력과 물자의 추가 투입으로 인한 기업의 손실은 배려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민간기업의 입장에서도 부당함을 지적하고 추가부담을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와 계약을 맺은 기업이 제때 납품을 하지 못해 부적격기업으로 지정되면 향후 몇 년동안 입찰에 참가할 수조차 없게 될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만한 기업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갑을의 불가역적인 관계 속에서는 갑질의 발호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건설교통부 장관은 그 자리에 봉직하는 동안 관용차의 사용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실제 시민들이 겪는 교통문제가 무엇인지를 체감함으로써 가역적인 갑을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자영업자와 최저임금인상의 괴리를 고민하는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 자신이 직접 식당, 편의점, 미장원등의 표본 몇 개를 철저히 관찰하여 실제로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갑질의 개선은 정부기관과 지자체가 먼저 나서서 모범을 보여야 그 실효성이 있다. 대기업의 갑질을 비난하고 징계를 내리는 국가기관이 민간기업과의 계약관계에서 오랫동안 관례가 되어져 온 갑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정책의 명분도, 실효도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