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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 조선시대 ‘금영 측우기’ 국보 승격

과학조사 통해 원리 새롭게 밝혀…측우대 2점 함께 국보 지정 예고

김길태 기자   |   등록일 : 2019-12-30 14: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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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 바닥면의 명문/자료=문화재청]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시대 측우기와 측우대가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증명해주는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원래 소재의 정확한 표기를 위해 각각의 명칭도 ‘공주감영 측우기’,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대구감영 측우대’로 바꾸는 변경안을 함께 예고했다.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기상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가뭄과 홍수 대비를 위한 측우기를 고안하고,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는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었다.

국보로 지정예고된 3점의 측우기와 측우대는 세계적으로 독자성과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아왔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고자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측우기는 1971년, 측우대는 1985년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은 것이다. 특히 ‘금영 측우기’는 1911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지에 처음 소개돼 세계 유일의 측우기로 보고됐다.

서양에서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과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지만 제작되지 못했고, 이후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최초로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다.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다.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는 조선 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금영)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돼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 8월18일자 기록에 의하면 기상관측 기관인 서운관에 대(臺)를 설치해 비를 받아 강우량을 측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1442년 5월8일 측정방식이 미진해 다시 원칙을 세웠으며, 이때의 원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금영 측우기’다.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따르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었으며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 바닥면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이어져 원칙에 맞게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운반이 편하게 상·중·하단 3개 금속기로 구성됐으며,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설계됐다.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했다.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자료=문화재청]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후면에 ‘측우대(測雨臺)’라고 새기고 ‘건륭 경인년(1770년) 5월에 만듦(乾隆庚寅五月造)’이라는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어 1770년(영조 46)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상면 길이와 폭이 36.7×37.0cm, 높이 46cm, 윗면 가운데 구멍은 지름이 15.5cm로서,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측우대는 영조 대의 제도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으며, 측우대 규격을 공식화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준다.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자료=문화재청]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정조 6년)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에도 이어졌음 알려주는 유물이다.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명문과 ‘동궐도’ 등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摛文院)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정면에 조선 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창덕궁 측우대 명문은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했으며 높이 1자 5치, 지름 7치라는 사실 △1770년(영조 46년)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八道), 강화부, 개성부에 두었다는 사실 △1782년(정조 6년) 여름에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사실 등을 알려준다.

국보 지정 예고된 ‘금영 측우기’, ‘대구 선화당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는 제작시기와 연원이 명확할 뿐 아니라 농업을 위한 과학적 발명과 그 구체적인 실행을 증명해주는 유물로, 문화사 관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은 국보로 지정 예고한 ‘금영 측우기’ 등 총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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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t0404@urban11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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